[2013/08/03]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간만에 비가 좀 오는 듯한 토요일의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
한국 사람들에게 하루키는 어떻게 기억될까. 내 경우는 (아마도 꽤 많은 이들이 그럴거라 생각하지만) 오래전 (무려 십여년 전) cf속 기차 안에서 어떤 여자가 들고 있던 '상실의 시대'가 그 시작이었던 것 같다. 십대부터 시작해서 이십대 초중반 까지의 꽤 오랜 시간은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을 읽고 그를 흉내내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다. 지금은, 좀 무뎌진 듯 하다.
2.
성, 죽음,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왠지 그럴 듯해 보이는 음악, 소년(의 감정), 여정. 이 몇가지의 키워드들은 그의 소설에 빠지지 않는 키워드인데 여기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며 작가 자신도 그걸 알면서도 약간은 고집스럽게 활용하는 듯 하다. 이 소설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 몇가지의 키워드를 고집하고 비슷한 느낌을 계속 가져가면서도 서로 조금씩 다른 소설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능력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런 느낌(?) 쪽으로는 그가 꽤 큰 영역을 견고하게 구축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수많은 (독자는 나이를 점점 먹어가는데도) 하루키 키드는 물론 하루키 아류를 만들어버린 것도 있고.
3.
제목부터 하루키스럽지만, 읽고 보니 꽤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에 색채를 넣겠다는 생각도 특이하고 그것을 상실한 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몇몇의 성적묘사는 '또?', '역시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겠으나 하루키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예전보다 좀 조심스러워 진 것 같고, 허무와 회의 역시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였는데 이 소설은 그에서 좀 벗어나려 했다는 느낌이 든다.하루키를 좋아한 이들은 후자 때문에 약간의 실망감을 느낄 것 같고, 하루키를 싫어한 이들은 전자를 두고 또다시 진부하다고 느낄 듯 싶다.
4.
특유의 대화들은 책을 쉽고 빠르게 읽히게 만들고, 특유의 장황한 설명은 (개인적으로는) 읽고 나서도 문장자체를 잘 기억나지 않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난 후 몇몇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점은 여전히 그가 작가로서 뛰어나다고 본다.) 좋은 작가나 훌륭한 작가라는 평은 좀 갈리겠지만 여전히 한 번 읽어볼까, 싶게 만드는 힘은 그가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주제를 그답게 건드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의 나이를 생각해서 그랬던 것인지 대강 중2나 중3 정도가 가질 감정을 드러내는 몇몇의 대사들은 이제 좀 오글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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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읽고나니 내 이십대는 어떠했나 생각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니 무언가 이루려고 보냈다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딱히 다른 것 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