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6] 나의 한국현대사
광복절 다음 날 쓰는, 현대사 서평.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
1959년 7월에 태어난 그가 그 이후 55년 간의 한국 현대사에 관해 쓴 책이다. 현재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부모세대가 보았고, 들었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의 동년배들 중엔 그와 다르게 살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2.
유시민, 그는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쓴다. 경상도 출신이지만 새누리와는 거리가 있고, 노무현 시기에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지만 예전 민주당의 적자는 아니다. 정치를 떠났다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 지금 노회찬, 심상정 등과 함께 정의당에 몸담고 있다. 권력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이들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 권력에 가까운/가까웠던 이들 중엔 가장 이질적인 인간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3.
4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인데 일주일동안 의도적으로 조금씩 읽었다. 워낙 굵직한 일들이 많았기도 하지만, 한국현대사를 거의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은 마음에 공부하는 심정으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것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들은 그 어떤 글들보다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한 것 같다. (그래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나의'라는 가장 주관적인 소유격을 붙였음에도 '역사'라는 주제 앞에 최대한 객관적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남북관계의 틀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엄밀히 노태우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공정하다.'라는 문장에서 최대치를 발한다. 그가 비판적으로 보는 다른 대통령들한테도 대부분 비슷한데 유독 전두환만은 예외다. 그 개인의 '투쟁역사'가 전두환시기에 맞물려 있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보지만.. 그냥 그 놈은 정말 개.. 라서 그럴 수도 있겠고. 전반적으로, 한국 현대사를 다룬 책들 중엔 가장 최신판(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까지를 담았다.)이고, 400페이지라는 공간에 적절히 읽기 쉽게, 꽤나 객관적이면서도 충분히 고민해볼 지점들을 적절히 쓴 책이다. 그리고 그 특유의 글쓰기 재능 덕분에, 재밌다.
4.
다만,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김대중/노무현의 시기를 '진보정권'으로 명명하고 '물론 그들에게도 역시나 실책은 있었다', 정도의 평이 내려지는 부분이다. 그 실책들에 대해 적지 않은 페이지를 할당했지만, 결코 충분하지 못했다. 이 역시 그가 몸담았던 '정치역사'와 맞물린 시기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시기에게 내려지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평가는 그 전후시기에 대한 반대급부에 기댄 측면이 많다. 그런 상대적 평가를 누리고 활용했던 책임은 그에게도 분명히(아니 상당히)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그를 지금보다 더 호의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못 쓴 것일 수도 있고, 안 쓴 것일 수도 있고, 써야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고, 진심으로 믿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의 표현대로 다른 이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책임있는 권리 행사가 '자유'이고, 그것이 권력으로 행사되는 것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점에서 그는 아직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5.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미국의 공화당이 보수, 민주당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그는 좀 더 왼쪽에 가까운 진보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보수고 그에 (최소한)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그는, 보다 더 왼쪽으로 치우친 진보다. 경제정책을 배제하고, 민주주의, 자유를 외치며 최소한의 정치적 합리성('합리'라는 단어는 '정의로움'과는 다르다.)을 좇을 수 있는 것이 곧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그 만한 진보주의자는 없다.
6.
그러나, 새정치연합이 '온전히' 새누리 덕분에 얻어먹는 지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진보에서 약간 오른쪽에 위치한 사람이다. 지금은 정의당에 있지만, 새정치연합과 정의당을 '정책'이 아닌 '후보와 그 후보가 가진 이력'으로만 구분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진보정당에 몸담고 있는 이가 아니다. 노무현을 진보라 부르기 멋쩍은 사람에게는, 그 역시 진보라고 부르기 멋쩍은 사람이다. 그가 복지부장관으로서 시행한 복지정책이 진정 복지의 증진을 만들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는, 진보인 척하는 사람이다.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와 그의 형제 격인 민주주의를 옹호할 뿐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는 보수다.
7.
개인적으로,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옹호되는 형태를 전제로 한 사회민주주의를, '최대한의 지향점' 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자가 맞다고 본다. 위에 괜스레 길게 적었지만, 어찌되었건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진보에 가깝다. (그보다 더 왼쪽으로 가려고 하면, 그건 진보가 아니라 -아주 역설적이지만- 구시대적 인간 혹은 종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진보로 (심지어 편협하지 않은 좀 괜찮은 진보로) 인정받는 국가나 사회는, 그 자체로 미숙하고 서글프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적 정당이 보수정당으로, 그리고 자유주의보다 더 적극적인 자유(책임지고 피해안주는 권리 어쩌고가 아니라, '스스로 말미암다', 가 자유의 원래 뜻이다. 스스로 말미암을 수 있게 하려면, 통용되는 '자유'의 개념보다 좀 더 급진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를 꿈꾸는 이들이 진보정당으로, 그리고 양쪽 끝에 더 오른쪽이고 더 왼쪽인 이들이 조금씩 위치한 사회는 불가능할까.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된다. 상상이 안 되니 가까운 미래에 현실로 이어질 리도 없다.
8.
사실 이런 상상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시급한 것은 일단 박근혜 시대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인 것 같다. 그녀를 넘어서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어떤 방식으로든 넘긴 넘었어야 할 것 같긴 하다.) 아직 그녀의 시대는 4년이 남았다. 설마.. 더 길어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설마...;;
아래는 몇몇 발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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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역사 중에서도 현대사는 특별히 민감하다.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주역들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죽고 없더라도 그들의 행위로 인해 억울하게 고통을 겪어거나 정당한 또는 부당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살아 있다. 우리는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강한 호불호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왕처럼 느긋하게 대하지 못한다.
P.21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존재하는 것을 개념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존재하는 것은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헤겔, '법철학')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철학자 헤겔의 주장이다. 통속적으로 해석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이 지식인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라는 '현실'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면 투표소에 가서 그에게 표를 던졌던 1,577만 명의 행위동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소망과 감정과 기대를 실어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던 것일까.
P.66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P.68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토크빌)
P.99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P.102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퍼센트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퍼센트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마그나카르타, 권리장전, 미국 헌법,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의 모토는 한갓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버나드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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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고, 등이 따시고, 그럭저럭 살만해지면 사람들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찾는다고 한다. 매슬로우가 했던 말을 유시민도 인용했다. 근데 보통의 사람들은 더 살만해지기를 원하는 것 같다. 자아 같은 건 없어도 밥을 굶지 않고, 자아라는 게 있어도 더 맛있는 밥을 먹는 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