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2015/04/25]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비밀 노트/타인의 증거/50년간의 고독

The uprooted 2015. 4. 26. 10:55

모든 존재는 거짓말을 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

1.
배경은 나치즘과 전쟁, 그리고 그에 이은 사회주의 체제가 이어진 20세기 초의 헝가리 작은 마을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 역사적 사실은 구체적으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은폐되어 있다. 또, 소설이 끝날 때까진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전쟁'이라는 거시적 사건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서술한 소설이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의 시작은 한 가정에서 발생한 미시적 사건 이후인데, 이 이야기는 그 어떠한 암시조차 없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다.

2.
이 소설의 주인공은 '쌍둥이'이다. 문학에서도 과학에서도 쌍둥이라는 존재는 '모든 개인은 유일하다.', 라는 암묵적이고도 광범위한 믿음에 도전하고자 했던 이들의 좋은 소재다. 작가는 탁월한 장치를 통해 독자에게 혼란을 안긴다. 1부의 이야기는 '우리'라는 복수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된다. 우리에 속한 이들 중 유일한 누군가가 자신들을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를 '우리'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독자는 첫번째 거짓말을 의심하게 된다. 그 화자는 정말 '그들'일까. 1부에서 쌍둥이가 헤어진 이후 2부의 화자는 '3인칭 시점'으로 그들 중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첫번째 거짓말에 대한 의심은 2부 마지막에 이르러 확신이 된다. 그러나 그 확신은 3부 시작과 함께 다시 두번째 거짓말이 된다.

3.
모든 소설은 거짓말이다. 세번째 거짓말이란 제목으로 명명된 3부에선 첫번째 거짓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던 '사실'조차 두번째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부정의 부정을 통해 사실이 된 이야기를 다시 부정하는 (그러나 이번엔 주인공들도 독자도 그것이 거짓말인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거짓말이 등장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닌 작가의 인터뷰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는 말은, 독자로 하여금 '사실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체험기'가 아니라 '소설'이다. 그것이 첫번째든 두번째든 세번째든, 모든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다. 소설 속 모든 문장은 이미 거짓말이다. (작가는 소설 속의 화자를 통해 '애매한 것을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 쓴다.'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 그것도 소설이 되면 거짓말이다.)

4.
모든 존재는 거짓을 품고 있다. 그런데, 존재라는 개념과 거짓이라는 개념은 일견 상충되어 보인다. 존재론이라는 이름의 철학은, '거짓을 더 이상 분리해낼 수 없을 만큼의 상태'를 존재로 이름 짓기 위한 시도였고, 이는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낳았다. 그리고 이는 다시 '거짓을 거짓이라 부르기 위해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거짓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는 또다시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흔히 거짓은 영속적인 것에 반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합리적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보통 모든 존재는 영속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거짓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거짓을 품어도 존재가 위협당하지 않는 수준은 어느 정도까지일까.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그 경계를 아주 묘하게 넘나들었다.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가상의 공간이 주는 안도감으로 인해 그 자체가 흥미롭고 재밌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존재와 거짓의 줄타기는 혼란을 넘어, 불안과 위협은 물론 더 나아가 회의와 냉소를 낳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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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거짓말에 당한 것 같은 느낌을 준 몇가지를 더 적자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이라는 제목은 원제가 아니라 작가의 세 작품이 하나로 묶여 번역/출간되면서 (한국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 세 작품의 원제 역시 위에 적은 제목이 아니라 실제로는 '커다란 노트, 증거, 세 번째 거짓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화자에 몰입해서였는지 작가 이름이 낯설어서였는지 남성작가가 쓴 책이라고 생각하고 내내 읽었는데, 알고보니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여성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