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Review

[2016/08/15] 라플라스의 마녀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으나, 하루에 다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라플라스의 마녀"

0.
처음으로 공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동경이 생긴 것은 다분히 드라마 '카이스트'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문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그려진 대학생활에 대한 동경이었겠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말하고, 해석할 수 없는 그림을 칠판에 그리던 주인공들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보였는지 모른다. IT회사에 입사한 것이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프로그래밍을 하는 개발자들을 보고 느낀 동경은 그 때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1.
프랑스 출신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고 천문학자였던 라플라스는, ‘만일 우주의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해명하고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라면서 '어느 순간 모든 물질에 있어서의 역학적인 데이터를 알고 그것을 순식간에 해석할 수 있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불확실한 것은 없어져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했다. 주로 근대의 물리학 분야에서 미래의 결정성을 이야기할 때에 가정하는 초월적 존재의 개념이라고 한다. 바로 이 존재에게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러한 내용이 이 책의 소재로 쓰였다. 

2.
작가는 공대를 다니던 학부 시절에 이런 개념을 처음 접했을까, 아님 우연히 마주했을까. 그러고 난 뒤엔 500페이지 분량의 이 소설이 머리 속에 하나씩 그려졌을까. 과학 이론을 보면서 소설을 상상해내는 작가라니, 얼마나 멋진가.

3.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생활 30주년을 기념해서, 일본의 평론가 니시가미 신타는 그가 써온 80권의 책들을, 다음의 여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했다. '과학 및 의학, 가족 관계, SF적인 소도구, 범죄의 심리, 사랑의 비극, 복수의 고통’. 그의 평에 따르면 ‘라플라스의 마녀’는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집대성, 까진 모르겠지만 이전에 읽었던 전작들에 비해서 다양한 내용을 한 번에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작업을 읽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4.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이 놀라운 점은 (그것이 어떠한 주제이든) 전혀 관련없을 것 같은 인물과 소재, 사건들을 산발적으로 소개한 뒤에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결국엔 오차 없이 이어낸다는 것이다. 마치 A4 용지 네 귀퉁이에서 시작된 다이어그램들이 각각의 선대로 이어지다가 결국은 종이 한 가운데서 모두 이어지는 느낌과도 같다. 마치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었을 때 일말의 찜찜함을 남기지 않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최우선 목표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5.
책 중간에 세계 7대 난제 중의 하나라는 나비에 스토크스(점성을 가진 유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비선형 편미분 방정식) 방정식도 중간에 잠깐 소개되는데,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등장한 'P-NP 문제’와 같이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게 하고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 찾아보았는데...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6.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한다는 것. 그것은 다른 이들도 납득할만한 근거를 찾는다, 라는 행위와 거의 같은 말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이들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간다. 생존하기 위해 행위하는 것들은 대부분 예측의 성격을 갖고 있다. 오지 않은 것은, 그것이 도래했을 때에 이르러서야 실제적인 참/거짓이 증명된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좌절을 안기기도 하지만 그것을 추측하는 것 자체에 많은 사람들은 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이 예측과 불확실성이 주는 역설이다. 이 소설 역시 그렇게 끝맺음된다.

-----

날이 날이니 만큼 일본 작가의 소설이 아니라 같이 읽고 있었던 조정래의 '유형의 땅'을 먼저 올려야하나 싶었지만... 그것도 억지스러운 것 같아서 앞서 읽기를 끝낸 소설부터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