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질 것 같아 둘 혹은 세부분으로 나누어 적어야 할 것 같다.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1) : '한국인의 정체에 접근하는 문제'부터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까지"
1.
오늘 오전 약 1/3 정도를 읽었는데, 여러가지 느낀 것이 많다. 조선 이후 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사상 그리고 사상사가 없다는 지적, 그에 따라 문학을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내어 시대의 사상을 밝히고자 하는 접근 방법, 공동체/이익사회/홉스식 자연상태 등등의 사회학적 정의를 통해 무너진 사회와 개인의 정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들 모두 흥미롭게 읽힌다. (물론, 독서를 이어가게 하는 흥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통찰력 있는 많은 지적들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2.
글 초입의 "인문사회과학 또는 문화과학의 연구 주제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떠오르게 되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 고민거리에 대한 연구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사실 그런 주제가 아니고서는 관심을 얻기도 어려울 뿐더러 지난 시절 고전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훈고학도 오늘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훈고학이 될 수 있다.
3.
신소설 이전 시기, '소설의 형태'을 가지고 등장한 홍길동전과 춘향전을 해석한 부분은 익숙하지 않지만, 효과적인 분석이다. 문학사적으로 이 두 이야기를 신소설 이전으로 분류하는 기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신화적 영웅소설/개인의 행복이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점) 각각의 소설을 '전래동화' 정도로 읽었던 이들에겐 신선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홍길동이 결코 혼란한 시대에 백성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허균은 연산군 시대를 살았지만, 소설의 배경은 그렇지 않다.- , 춘향이 몽룡에게 반한 이유는 그가 그저 멋진 도련님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등등)
4.
사실, 이 서평을 쓰려고 했던 핵심은 이제부터다. 처음 대학 학부 시절에도 충남대까지 교환학생으로 가서 국문학사를 들었었고, 불과 지난 학기만 해도 근현대문학사를 배웠음에도 신소설시기는 그냥 짧게 (의의는 있지만 그건 그저 과도기였다는) 지나쳐서 기억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이인직의 혈의 누' 밖에 없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분석을 읽고 나니 요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싶어졌다. 김대중/노무현의 시기가 1950-60년 대의 해방정국과 유사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명박/박근혜의 시기는 그보다 50년 뒤로 간 것 같다. 저자는 이 시기를 '국가도 사회도 개인도 무너져버린 시기'로 평하고 있다.
5.
근대소설의 등장을 이야기하며, 루카치는 "세계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근대소설의 최초작으로 평가받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개인이 개인으로서 현실에 부딪히는 과정과, 자아와 세계가 충돌할 때의 이상과, 이상이 좌절되어 다시 그 현실에 편입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한국)문학사에서 정의하기 힘든 - 중세와 근대 사이라고만 규정할 수 없는 - 근대 이전의 시기가 바로 신소설시기이다. 개인으로서의 욕망이 등장하지만, 이상도 현실도 없이 온갖 욕망이 (심지어) 엽기적으로 떠돌다가 그냥 소멸(편입/변형/승화와는 엄연히 다르다.)되어 버리는 식이다.
6.
많은 문학사가들이 이 시기의 소설들이 '초현실', '비현실'적 배경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그 시기의 현실이었다고 본다. 지금의 우리는 다를까.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후대가 지금을 기억할 땐 어떨까.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다. 수백명이 사망했다. 선장은 팬티바람으로 제일 먼저 도망쳤다. 민간잠수사를 사칭한 이가 언론에 등장해 울먹거렸는데 알고보니 거짓말이다. 해경은 최초구조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그 해경의 핵심 인물이 침몰한 배의 소유주와 밀접한 관계다. 구조의 핵심역할을 맡은 업체도 알고보니 똑같은 상황이다. 누군가는 키보드로 물 속에 갇힌 이들을 조롱하고 낄낄댄다. 죄없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상을 죄스러워한다. 시간이 흘렀는데, 2주 전과 달라진 것은 아직도 밝혀져야하는게 많다는 것 뿐이다. 국가와 정부와 사회는 분노를 조장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은 아니라고 너무 당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최선봉에 있는 이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여기는 대통령이다. 심지어 이 모든 이들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를 두고 '21세기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 사건들이 난무한다. 정작 슬픈 건, 지금 이 시기의 우리들은 그게 현실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증명하고, 더더구나 변화시켜야 되는 요구까지 받는다. '우리'는 정말 잘못한 게 없을까. 어른들이 미안하다, 라고 이야기하면 비현실적 현실을 이대로 통과시켜 버리는 책임이 과연 사해질까.
7.
'우리'. 친밀감을 표현하는 단어지만 그 어떤 것보다 배타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되기 위해선 이질적인 부분이 최소화되거나 적어도 동질감이 이질감을 넘어서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닌 이들,이 아닌 이들' 이라는 이중부정을 통해서 정의되었다. 아주 낮은 수준의 정체성이다. 선악의 구도 역시 마찬가지다. 악은 내가 왜 악인지 증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보통은 스스로 선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악을 증명해주기 위해 애쓴다. 딱한 것은 그 증명하는 행위 자체로 스스로를 선으로 다시 규정하는 짓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회색지대에 있는 이들은 혼란스럽다. '그래, 니가 악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근데 니가 왜 선인데?' '쟤네가 악이고 나는 악이 아니니까.'
8.
이런 식의 구도에서 가장 빈번하게 행해지는 것은 저자가 지적한 대로 '경멸의 반복적 일상화'다. 이는, 혼란스러움에서 거리를 두려는 태도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갖게 되는 기대와 믿음이 추락했을 때의 방어기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개인의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태도일 수 있지만, '우리가 아닌 이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된다. 경멸이 일상화된 이들과 악이 아니니까 선이라고 믿는 이들이 가득하다 보니, 나/우리/사회 정체성 따위는 너무 피곤하고 꼰대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공통의 의지와 권력이 없는 상태에선 법이 없고, 법이 없으면 불의도 없다. 심지어 '나' 아닌 것은 모두 믿지 못하는 불신이 함께 한다. 어느 글에서 김정환이 적었던 것처럼, '우리'라는 정체성이 없고 나 이외의 것을 불신하는 이들일 수록 다시 '가족'(최소한의 믿음이 존재하고 모태공동체가 되는)으로 회귀하는 듯한 지금의 모습이 결코 갑자기 그냥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9.
국가나 사회로부터 배신 당한 이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국가와 사회를 배신'하는 것이다. 이민을 가거나, 사회를 등지는 범죄자가 되거나, 극단적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들이다. 이 중 가장 궁극적인 형태로서의 개인적 행위인 자살은, 어느 종교나 사회에서도 금기시하는 것인데, 체계를 구축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영향이 최종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 체계 속의 제3자들에게는 그러한 한계가 이 공간에 '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로인한 불안감을 깊숙히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말 최악인 상황은, 그러한 행위조차 일상화되는 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지점에 위치해버린 건 아닌지 싶다.
10.
신소설의 결말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유학을 가거나 자살을 하거나. 어느 경우건 국가와 사회를 배신하는 형태로 끝나버린다. 이번 사고 유가족의 한 분은 국가를 버리고 이민을 가겠다고 했다.(동시에 표현하지 않았어도 기회만 된다면 이 공간을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전국민적으로 심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다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분노의 해소는 중요하지만 찰나일 뿐이다. 분노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왜 분노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시도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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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랜만에 사회과학도인 척을 하고나니 부끄럽다.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1) : '한국인의 정체에 접근하는 문제'부터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까지"
1.
오늘 오전 약 1/3 정도를 읽었는데, 여러가지 느낀 것이 많다. 조선 이후 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사상 그리고 사상사가 없다는 지적, 그에 따라 문학을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내어 시대의 사상을 밝히고자 하는 접근 방법, 공동체/이익사회/홉스식 자연상태 등등의 사회학적 정의를 통해 무너진 사회와 개인의 정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들 모두 흥미롭게 읽힌다. (물론, 독서를 이어가게 하는 흥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통찰력 있는 많은 지적들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2.
글 초입의 "인문사회과학 또는 문화과학의 연구 주제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떠오르게 되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 고민거리에 대한 연구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사실 그런 주제가 아니고서는 관심을 얻기도 어려울 뿐더러 지난 시절 고전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훈고학도 오늘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훈고학이 될 수 있다.
3.
신소설 이전 시기, '소설의 형태'을 가지고 등장한 홍길동전과 춘향전을 해석한 부분은 익숙하지 않지만, 효과적인 분석이다. 문학사적으로 이 두 이야기를 신소설 이전으로 분류하는 기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신화적 영웅소설/개인의 행복이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라는 점) 각각의 소설을 '전래동화' 정도로 읽었던 이들에겐 신선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홍길동이 결코 혼란한 시대에 백성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허균은 연산군 시대를 살았지만, 소설의 배경은 그렇지 않다.- , 춘향이 몽룡에게 반한 이유는 그가 그저 멋진 도련님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등등)
4.
사실, 이 서평을 쓰려고 했던 핵심은 이제부터다. 처음 대학 학부 시절에도 충남대까지 교환학생으로 가서 국문학사를 들었었고, 불과 지난 학기만 해도 근현대문학사를 배웠음에도 신소설시기는 그냥 짧게 (의의는 있지만 그건 그저 과도기였다는) 지나쳐서 기억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이인직의 혈의 누' 밖에 없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분석을 읽고 나니 요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싶어졌다. 김대중/노무현의 시기가 1950-60년 대의 해방정국과 유사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명박/박근혜의 시기는 그보다 50년 뒤로 간 것 같다. 저자는 이 시기를 '국가도 사회도 개인도 무너져버린 시기'로 평하고 있다.
5.
근대소설의 등장을 이야기하며, 루카치는 "세계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근대소설의 최초작으로 평가받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개인이 개인으로서 현실에 부딪히는 과정과, 자아와 세계가 충돌할 때의 이상과, 이상이 좌절되어 다시 그 현실에 편입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한국)문학사에서 정의하기 힘든 - 중세와 근대 사이라고만 규정할 수 없는 - 근대 이전의 시기가 바로 신소설시기이다. 개인으로서의 욕망이 등장하지만, 이상도 현실도 없이 온갖 욕망이 (심지어) 엽기적으로 떠돌다가 그냥 소멸(편입/변형/승화와는 엄연히 다르다.)되어 버리는 식이다.
6.
많은 문학사가들이 이 시기의 소설들이 '초현실', '비현실'적 배경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그 시기의 현실이었다고 본다. 지금의 우리는 다를까.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후대가 지금을 기억할 땐 어떨까.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다. 수백명이 사망했다. 선장은 팬티바람으로 제일 먼저 도망쳤다. 민간잠수사를 사칭한 이가 언론에 등장해 울먹거렸는데 알고보니 거짓말이다. 해경은 최초구조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그 해경의 핵심 인물이 침몰한 배의 소유주와 밀접한 관계다. 구조의 핵심역할을 맡은 업체도 알고보니 똑같은 상황이다. 누군가는 키보드로 물 속에 갇힌 이들을 조롱하고 낄낄댄다. 죄없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상을 죄스러워한다. 시간이 흘렀는데, 2주 전과 달라진 것은 아직도 밝혀져야하는게 많다는 것 뿐이다. 국가와 정부와 사회는 분노를 조장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은 아니라고 너무 당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최선봉에 있는 이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여기는 대통령이다. 심지어 이 모든 이들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를 두고 '21세기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 사건들이 난무한다. 정작 슬픈 건, 지금 이 시기의 우리들은 그게 현실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증명하고, 더더구나 변화시켜야 되는 요구까지 받는다. '우리'는 정말 잘못한 게 없을까. 어른들이 미안하다, 라고 이야기하면 비현실적 현실을 이대로 통과시켜 버리는 책임이 과연 사해질까.
7.
'우리'. 친밀감을 표현하는 단어지만 그 어떤 것보다 배타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되기 위해선 이질적인 부분이 최소화되거나 적어도 동질감이 이질감을 넘어서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닌 이들,이 아닌 이들' 이라는 이중부정을 통해서 정의되었다. 아주 낮은 수준의 정체성이다. 선악의 구도 역시 마찬가지다. 악은 내가 왜 악인지 증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보통은 스스로 선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악을 증명해주기 위해 애쓴다. 딱한 것은 그 증명하는 행위 자체로 스스로를 선으로 다시 규정하는 짓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회색지대에 있는 이들은 혼란스럽다. '그래, 니가 악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근데 니가 왜 선인데?' '쟤네가 악이고 나는 악이 아니니까.'
8.
이런 식의 구도에서 가장 빈번하게 행해지는 것은 저자가 지적한 대로 '경멸의 반복적 일상화'다. 이는, 혼란스러움에서 거리를 두려는 태도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갖게 되는 기대와 믿음이 추락했을 때의 방어기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개인의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태도일 수 있지만, '우리가 아닌 이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된다. 경멸이 일상화된 이들과 악이 아니니까 선이라고 믿는 이들이 가득하다 보니, 나/우리/사회 정체성 따위는 너무 피곤하고 꼰대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공통의 의지와 권력이 없는 상태에선 법이 없고, 법이 없으면 불의도 없다. 심지어 '나' 아닌 것은 모두 믿지 못하는 불신이 함께 한다. 어느 글에서 김정환이 적었던 것처럼, '우리'라는 정체성이 없고 나 이외의 것을 불신하는 이들일 수록 다시 '가족'(최소한의 믿음이 존재하고 모태공동체가 되는)으로 회귀하는 듯한 지금의 모습이 결코 갑자기 그냥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9.
국가나 사회로부터 배신 당한 이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국가와 사회를 배신'하는 것이다. 이민을 가거나, 사회를 등지는 범죄자가 되거나, 극단적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들이다. 이 중 가장 궁극적인 형태로서의 개인적 행위인 자살은, 어느 종교나 사회에서도 금기시하는 것인데, 체계를 구축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영향이 최종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 체계 속의 제3자들에게는 그러한 한계가 이 공간에 '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로인한 불안감을 깊숙히 느끼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말 최악인 상황은, 그러한 행위조차 일상화되는 것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지점에 위치해버린 건 아닌지 싶다.
10.
신소설의 결말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유학을 가거나 자살을 하거나. 어느 경우건 국가와 사회를 배신하는 형태로 끝나버린다. 이번 사고 유가족의 한 분은 국가를 버리고 이민을 가겠다고 했다.(동시에 표현하지 않았어도 기회만 된다면 이 공간을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전국민적으로 심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다음이 없었으면 좋겠다. 분노의 해소는 중요하지만 찰나일 뿐이다. 분노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왜 분노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시도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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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랜만에 사회과학도인 척을 하고나니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