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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2014/11/16] 당신이 모르는 제주, 여섯번째 - 제주의 선사 유적

1. 대략적인 이야기

구석기 시대의 경우 제주는 섬이 아닌 중국/일본/한반도와 연결된 대륙의 일부였고 섬이 된 건 기원전 1만년 전 신석기 초입에 들어서였다. (그래서, 구석기 문화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고 한다.)

한국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원래 기원전 6천년 전으로 추정되었으나, 제주도 고산리 유적지가 발굴된 이후 약 1만년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2002년 이후, 개정된 국사 교과서에서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로 제주도 고산리가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신석기에 와서도 여전히 이동생활 및 채집생활이 주를 이뤘다. 북촌 바위그늘 집자리, 속칭 고두기 '엉덕'은 신석기 후기 유적인데 여기는 가보지 못했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0세기 경으로 추정되지만, 제주는 그보다 늦은 6세기 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고인돌의 제작 시기 역시 더 늦은 청동기 후대 이후이다.) 대정읍 상모리 유적지는 기원전 600년경 제주도에 처음으로 청동기인들이 들어와 생활한 흔적으로 추정되며, 오늘 가본 삼양동 마을 유적은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지이다. (우리 집 바로 앞이다.)


2. 삼양동 선사유적 - 고인돌

삼양/도련 지역에서 발견된 4기 중 하나. 삼양/도련 지역의 고인돌은 남방식지석묘(무덤 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둘레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뚜겅돌을 덮는 형태 -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 이라고도 부른다.) 용담동 선사유적의 고인돌보다 작아서 이후 용담동 쪽 세력에게 삼양동 세력이 밀린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지역위치상 일도, 이도, 삼도, 화북, 삼양 쪽 구제주가 노형, 연동, 용담 쪽 신제주에 밀린 모양과 유사하달까 -_-?;)

3. 삼양동 선사유적 - 움집

총 230개 가까이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몇 개가 아래와 같이 복원되어있다. (날씨가 안 좋고 약간 황량해서인지 어째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저 바로 건너편은 삼양앞바다(검은모래해변)이다.

크게는 3가지 형태인데, 위와 같은 원형움집(작은 움집들)이 가장 많다. (반지하+중앙기둥형태를 하고 있고 한반도의 송국리식 움집과 같은 형태이다.)

특이한 형태로 한 개 복원되어 있는 것이 아래와 같은 장방형움집이다. (눈으로 보기에 많이 특이하진 않고; 좀 더 직사각형 형태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원형움집 이후의 형태이며 내부 화덕이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2개인 것이 특징이고, 공동체의 공동작업을 위한 공간이었다.

아래의 부족장 움집은 일단 상대적으로 다른 원형움집보다 좀 크고 내부에 별도의 창고시설이 존재하며, 중국제 옥환이나 대형 토기 등의 출토를 바탕으로 상위계급자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이런 대형거주지 1기에 소형 주거지 10여기가 모여있는 형태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고상가옥이라고 불리는데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운 흔적을 근거로 복원된 것 같다. 마을의 공동곡식창고 같은 역할을 했다.

4. 그 밖에...

사실 탐라국 이전 가장 세력이 컸던 용담동 선사유적도 있는데 여긴 공항/요즘 주택지 건설 등으로 인해 제대로 조성된 유적지가 없다. (공항 가는 길에 복원된 움집과 고인돌 몇 기가 모여 있긴 한데, 가장 작은 1기 빼고는 제대로 복원되지도 못했다고 하고 대부분의 움집이 추정되거나 아니면 삼양동의 것을 보고 그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이 용담동 세력 등장 이후, 삼양동 세력이 쇠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후 등장하는 탐라국은 한참 뒤 고려시대에 이르러 한반도 지역체제에 편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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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역시 선사 유적은 뭔가 친숙하질 못해서 발굴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하면 쓸 이야기가 많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