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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2016/01/21] 프란츠 카프카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이틀 늦은 기록.

"편영수, 프란츠 카프카"

1.
재작년 가을, 회사 합병이 결정되면서 우리는 '--님'이라는 호칭대신 영어(정확히는 한글이 아닌,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이름을 써야한다고 했다. 남들과 겹치지 않으면서, 굳이 영미권에서 쓰이는 이름이 아닌 걸로 하고 싶어 고민을 좀 했다. 이왕하는 거 사르트르로 할까, 아예 까뮈로 할까 아님 진짜 칼 맑스라고 해볼까 별 생각을 다 하다가 결국 결정한 이름 겸 아이디. Franz.Kafka.

2.
프라하를 가보고 싶었던 가장 첫번째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3.
문학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짧은 시간을 살다간 작가들에 대한 환상 혹은 동경 같은 것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윤동주를 좋아하면서 이상을 좋아하지 않는 이를 본 적이 없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김수영도 좋아한다. 카프카도 그렇다. 이 작가들은 글 뿐만 아니라 그 작가 자체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생이 길지 못해 그런지 그들의 삶과 글은 거의 하나다. 이 작가들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카프카에 대한 얇은 책 한 권(편영수, "프란츠카프카" - 아래는 발췌)을 읽었다. 그의 삶과 글, 문학.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5.
읽고, 쓰고,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 10년 뒤에도, 30년 뒤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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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이야기들은 그것들의 출발점 주변을 순환하다가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이야기들은 작가 자신이 모든 진술을 부인하고 철회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모든 진술을 거부하는 카프카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며 표현형식인 '미끄러지는 역설'은 모처럼 얻은 확신을 다시 의문에 빠뜨린다. 의미의 전이, 인용의 왜곡과 반전, 통상적인 의미연관과 알레고리적인 지시의 부재 등과 같은 방향전환 전략으로, 확고한 개념들은 유동적이 된다. 이로써 독자는 종래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관계에 들어선다."

"카프카 문학이 난해한 또 다른 이유는 카프카가 현실세계와 꿈의 세계를 동일한 평면에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일상의 현실을 변형하여 현실세계와 함께 유일한 전체를 형성하는 신비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카프카는 꿈의 기법을 사용한다. 카프카가 채택한 형상화 수단으로서 꿈은 사건들의 무한계성, 시간과 공간의 신속한 극복, 시점의 갑작스러운 교체, 사건들의 뒤섞임, 소재의 유연성, 인과적인 연결을 대체한 다양한 형상의 연속, 놀라운 연상과 다양한 인물로 분해하는 주인공을 가능하게 한다."

"또 다른 해석자들은 카프카 문학의 사회적, 정치적인 전제조건들을 인식했다. 이 해석은 카프카를 자본주의 사회질서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제의 위계질서 속에서 제도화된 여러 가지 종류의 소외의 흔적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최근에는 카프카 문학에 나타난 해석학적인 문제성이 연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진리의 추구와 인식의 거부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해설의 열쇠로 이해된다."

"카프카는 비범할 정도로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우리가 속한 사회적, 정치적 삶의 현실을 기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실이 성립되고 '전체'로서 정돈되고 존속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전제조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체'를 파악하려고 시도힌다.실제로 카프카의 전 작품은 인간세계의 무법칙성을 극복하고 보편적이고 구속력을 지닌 진실의 법을 획득하기 위한 부단한 투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문학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늘 유한하고 외견상 견고하게 정돈된 질서에서 쫓겨나 갑자기 공포를 느낄 정도로 현 존재의 전체와 부딪히고, 그로 인해 갈피를 못 잡고 비틀거리면서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서 부동의 목표로 삼은 진실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 법칙을 찾아 나선다. 그가 수행하는 투쟁은 이 세계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형식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다."

"카프카 문학에서 자아는 꿈과 같은 환상세계의 순수한 자아와 생생한 경험세계의 일상의 자아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두 자아는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우리는 순수 자아와 상대세계로 표시할 수 있는 일상의 자아 사이의 투쟁을 카프카 문학의 한 주제로 상정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은 순수 자아를 보존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이 투쟁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는 비록 순수 자아를 동경하지만 늘 일상으로 되돌아오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노동자들이 현재 그들이 받고 있는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부자의 사치는 빈자의 불행으로 값을 치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겸손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다음은 카프카가 부상당한 노동자들에 대해서 브로트에게 전한 말이다. - 이 사람들은 얼마나 겸손한가? 그들은 우리에게 부탁하러 온다네. 사무실을 습격해 모든 것을 깨부수는 대신 부탁하러 온단 말일세."

"카프카는 사회주의자들에게 공감했지만 그들을 믿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 그 중에서 특히 혁명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극희 회의적이었다. 진정 혁명적인 모든 발전의 종말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타나고, 홍수의 물결이 광범위하면 할수록 강물은 더 잔잔하고 더 깊게 흐르는 법이며, 혁명의 물결이 퇴조하면 새로운 관료제의 수문이 남게 된다고 예견하고 있다."

"잠언 90번에서 카프카는 두 가지 실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신을 무한히 작게 만들거나, 또는 무한히 작은 것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카프카 자신의 표현대로 완성이며 무위이다. 무위는 도의 완전한 운동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불위와는 다르다. 카프카는 무위를 망치질로 비유한다. 정말 굉장한 망치질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망치질로 비유되는 무위(무)는 정신세계로서, 유라 말할 수 있는 현상세계를 비로소 쓸모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