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벌써 3주차.
"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
1.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와 같이 역사적 사실을 겪어낸 개인의 삶을 다루는 소설의 시도들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거나 배운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마치 실제 보고 겪고 있는 이야기와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우리가 학교나 역사책에서 배우는 역사는 객관화의 틀을 한 번 씌운 텍스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소설들 덕분에 그 텍스트들이 타자화되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 이기호의 이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 역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한강보다는 좀더 가벼운 문체로, 그러나 사실로 존재했던 그 과거의 잔혹함들을 하나하나 기록해가면서.
2.
한국의 근현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다. 한국이란 공간에서 그 시간을 지배했던 이들은, 2017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작년부터 뉴스에 분단위로 등장하는 그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잊고 산다. 1970년대, 80년대를 그린 텍스트들을 보면 슬픔을 넘어 있는 그대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하기까지 하지만, 지금도 그 잔혹함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세련되어진 것 같은 형태로, 그리고 은근하게, 때로는 자발적으로 체득해가게 하면서 그 모습을 바꾸어왔을 뿐이다.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은 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긴장감을 다시 깨우는 역할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왜 달라진 것처럼 외면하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3.
책에 함께 실린 서평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소재이자, 주제이고, 배경이자, 줄거리이다.
“어떤 사람에게 역사는 그저 저만치 지나가는 행인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협잡꾼이고 폭력배이며 살인마다. 1980년 9월 1일, 육군 소장 전두환이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후 경찰과 검찰은 출세를 위한 과잉 충성의 열기 속에서 전국적으로 ‘빨갱이 만들기’에 나섰다. 1981년 6월의 학림(서울)-부림(부산)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용공 조작의 광기를 강원도 원주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82년 3월 18일에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한 문부식과 김은숙은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만나기 위해 원주에 왔고 4월 1일에 자수했는데, 수사 당국은 외려 관련자들을 찾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피의 보복에 나섰다. 원주가 고향인 이기호는 당시 겨우 열 살 남짓의 소년이었지만, 그로부터 이십수년 후에 그가 성실히 조사하고 간곡히 상상하여 썼을 이 소설은 그 광기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삶과 꿈이 어떤 식으로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어느 피의자가 자신의 죄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온갖 착오와 거짓말과 부조리가 엉키는 와중에 결과적으로 죄를 짓고 마는, 밀란 쿤데라(‘소설의 기술’)였다면 카프카적인(Kafkaesque) 악몽이라고 했을 법한 이야기다. 이런 무거운 소재 앞에서도 ‘이야기꾼’의 어조와 호흡을 절묘하게 운용하면서 시종 ‘희비극적’이라고 해야 할 어떤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기호 소설의 특징이다. 작가라면 비극적 감상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웃어야(웃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윤리적 준칙일지도 모른다. 후반부의 착잡한 진실 앞에서는 견디기 힘든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서는 많이 웃은 만큼 결국 더 아파지기 때문에 희극조차 이미 비극의 한 부분이다. 쉽게 읽히지만 빨리 덮기 어려운, 깊이 상처입은 사람의 쓸쓸한 농담 같은 소설이다. - 신형철”
4.
책을 덮고 갑자기 떠오른 기억. 며칠인 1월 14일은 박종철 열사의 기일이었다. 그리고 박종철이 이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고문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그 선배 이름은 박종운이다. 그는 한나라당의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몇 번 나서기도 했다. ( http://h2.khan.co.kr/201701132357001 ) 역사는 이렇게 비극적이다. 잊혀지면 잊혀진 만큼 더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비극이 청와대에, 헌법재판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더더욱 비극적이다.
5.
소설을 읽는 것인지, 누군가로부터 후일담을 직접 듣고 있는 것인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인지,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사실로 존재했던 이야기인지, 작가는 ‘일부러’ 그 모든 시도를 흐트려놓았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중간 괄호나 혹은 직접적인 서술로 개입하는) 작가의 다소 산만하기까지한 그 실험, 시도들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훨씬 더 슬펐을 것이다. 그 실험, 시도를 거쳐서 문학적으로는 희비극적인, 요즘 말로는 웃픈 소설이 되었다. 위의 평론에 있는 것처럼 카프카적인 악몽을 서술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6.
나복만이라는 사람이 이름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은,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적어도 착하고 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 해를 입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그런 이들을 밟아 살아남는 사람들 때문이라도(그리고 그런 이들이 보통 힘과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도) 아마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그 어려움은 불가능으로 바뀔 것이다. 그 상상이 불가능의 세계로 가버리진 않기를. 이미 가버린 것도 아니기를.
——
올해의 두번째 책이었다. 새번째로 읽고 있는 책은, (갑자기 뭔가 몇차원 이동한 느낌이지만… 어찌하다보니 여튼) 행복한 프로그래밍이다.
Book Review